우산을 잃어버리다

 
어제는 우산을 잃어버렸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4년 넘게 써오던 검은색 우산이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찰나의 거장' 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동네 지하철역에 도착해 들렀던 근처 은행에서, ATM을 사용하는 동안 옆에 잠시 놔두고는 까맣게 잊고 나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생각나 급히 되돌아왔지만, 벌써 우산은 사라진 뒤였다. 10분 남짓의 시간동안 청소부가 왔다 간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었까. 소득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쓰레기통까지 들여다보다가 문득 우산을 ATM 옆에 놔둘때에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우산을 놓은 반대편쪽에 하늘색 우산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던. 그래. 나는 그것을 보고도 그 하늘색 우산 주인과 똑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결국 체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선 먼저 든 감정은 상실감이었다. 동시에 당혹감과 아쉬움도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우산을 비롯한 물건을 완벽하게 챙기는 타입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딴 생각에 잠겨서 무심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아마 어린시절부터 세어보면 잃어버린 우산이 적어도 서너개는 가볍게 넘을 것이다. 그렇기에 4년 동안 한결같이 쓰고도 잃어버리지 않은 그 우산은 분명 기록이었다. 특히 4년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외출이 증가했던 시기라고 할수 있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 동안 교실에 하루 넘게 두고 온적도 많았고 대학 강의실에 두고 나왔던 적도 여러번이었지만, 용케도 그 검은색 우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그렇게 매번 되찾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있다가 기적처럼 발견해 되찾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곧바로 되돌아갔는데도 못찾았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이 컸다. 멀쩡하게 생겨갖고 비가 많이 올때는 한두방울씩 비가 새던 그깟 우산, 잊고 다른 새 우산을 찾으면 그만일텐데..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오랫동안 정이 들어서 그런 것일까.

뭐어. 지금 여기서는 이렇게 써놓겠지만 사실 잃어버린 우산에 대한 기억 따위, 며칠이 지나면 곧 잊어버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벌써 '오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제'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오늘의 감상은 벌써 어제 당시의 그 감흥과는 사뭇 달라졌다.

결국 그 정도의, 그런 이야기다.
우산을 잃어버린 것을 기념해서, 델리스파이스의 '처음으로 우산을 잃어버렸어요'를 듣고 싶지만, 이미 배경음악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 Op.36이 흐르고 있다. 가보고 싶었던 2005 교향악 축제의 마지막 프로그램, KBS교향악단 공연의 라디오 실황이다. TV에서는 KBS 뉴스9 소리가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뉴스는 어느새 단신이 지나고 정세진 아나운서가 오늘의 메인뉴스 마지막 아이템을 말하고 있는 참이다. 교향곡은 몇악장째지? 원래 잘 모르는 곡이기에 알리도 없다. 하지만 바로 전에 연주했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참 좋았다.
잠깐! 우산은? 그래. 이것은 우산 이야기였지.

어제는 우산을 잃어버렸다.
4년동안 써온 검은색 우산.
그 우산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방금 뉴스가 끝났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연주도 끝났다. 박수소리가 시끄럽다. 곧 앵콜이 시작되겠지.. 젠장, 주말에 재방송(?) 해주면 그때나 다시 제대로 들어야겠다.
오늘밤엔 윔블던 테니스 준결승이나 보자. 그런데 지금은 10시, 드라마타임이네.
.. ... 이미 TV 채널 결정권은 내손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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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달크로즈

2005/06/30 22:10 2005/06/3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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