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五月)
피천득(皮千得)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은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오월'은 피천득 선생님의 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중 하나다.
2005년 5월 13일 오후 네시.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낭독되는 걸 들었던 것이 첫 기억이었고, 이젠 나 또한 스물한살의 오월을 추억하는 나이가 되었다.
거리를 채우는 연한 초록빛이 가장 미칠듯이 빛나는 때는,
5월 중에서도 바로 '봄비 내린 다음 날'이다.
2007년 5월 25일도 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의 끝자락에, 하늘을 떠난 그가 행복하길 빈다.
Requiescat in Pace.
ps. 이 시대에 거장들은 항상 떠나기만 한다. 올해만도 가슴아픈 부고가 여럿있었다. 이쯤되면 다음차례는 누구일까 걱정될 정도다.
장 보드리야르, 커트 보거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피천득.. 모두 모두 평안하길.
Posted by 달크로즈




